상단여백
HOME 포토&TV 음성의 소리
<음성의소리> 동학농민혁명의 날…선각자 흔적 찾아 나선 ‘이상정’음성읍 사정리 강당말, 6기 대형봉분 제향 봉행
일부 토양에서 인 성분 발견 “무덤인 것은 확실”

지난 2019년 2차 발굴조사 당시 조사단과 의견을 나누고 있는 이상정 의원.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 옹대동 60-1 일대에서 지난 11일 동학농민혁명의 날을 기념하는 제향이 봉행됐다. 

지난 2018년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을 황토현전승일인 5월 11일로 선정한 바 있다.

강당말 옹대동, 이 곳에는 근대민족운동 시기에 전국적인 반봉건, 반침략운동으로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동학농민군의 묘소 또는 항일의병 묘소로 추정되는 대형묘소가 있다.

묘소의 규모는 6기의 봉분으로 된 집단묘소이며 큰 묘소의 봉분이 높이 5m, 폭 10m, 길이 20m 정도이다.

사정리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이 묘소는 ‘동학군묘’로, 동학농민혁명 때 마을의 소를 잡아 먹는 일본군들에게 주민들이 항의하자, 일본군이 마을에 불을 질러 가옥 3채만 남고 모두 불에 탔다고 한다. 이 때 마을 강당도 불에 전소된다.

이후 동학군과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당시 희생된 동학군의 묘소라는 게 주민들의 구전이다.

다른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 묘소는 항일의병 묘소라는 설이다.

국내 항일운동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충청북도편에 의하면 이 묘소의 주변 지역인 음성읍사정리에서 실제로 1907년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6명의 의병이 이곳에 안장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동안 음성군은 묘소의 성격을 밝히고자 지난 2017년 1차 발굴조사 1호 묘소 조사를 했고 2019년 2차 조사를 통해 2호·3호 묘소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드론으로 본 2차발굴조사 현장 모습.

지난 2019년 당시 호서문화유산연구원 주선웅 연구원은 먼저 “인골이나 유품을 찾을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당시 사정상 제대로 시신처리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100년 정도 흘렀기 때문에 산화되거나 쓸려 내려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 연구원은 “조상들이 밟고 다녔던 땅인 구지표를 찾아 당시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며 “100년 동안 쌓인 흙을 없애고 의미 있는 흔적이 나오면 집중적으로 조사해 나갈 것”이라고 부연했다.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서는 “구지표 위에 시신들을 안치한 후 봉분을 올린 경우에는 땅을 파지 않았기 때문에 구지표 면에서 흔적을 찾아야 하고, 땅을 파고 그 안에다가 매장한 경우에는 굴착한 흔적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골은 풍화작용에 의해 산화될 수도 있고 유실될 수도 있지만 묘라는 흔적은 확인 할 수 있다”며 “충분한 정보를 찾기 위해 구지표상의 흙 성분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 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현재까지, 이 묘소는 한국역사의 큰 분수령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인 동학농민운동과 일제에 항쟁했던 음성의병의 활동을 확인시켜 주는 역사적 유적지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지난 11일 동학농민혁명의날을 맞아 6기 봉분에 대한 제향이 봉행됐다.

수년 째, 이 묘소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이상정 충북도의원은 “전국적으로 동학농민군의 실존 무덤은 거의 없고 대부분 가묘 형식으로 존재하고 의병묘도 드물다”고 “항일운동의 선각자였던 우리 조상들의 순국을 절대로 헛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일부 봉분에 대한 조사를 통해 토양에 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무덤인 것은 증명된 셈이다. 다만, 이 밖에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정 의원은 “전체 발굴조사를 통해 흔적을 확인한 후, 유적지로 등록시켜 성역화 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묘소는 음성향토사연구회 김영규 회장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영규 회장이 이 묘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김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묘소는 수 십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벌초를 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방치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국유림사업소에서 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김 회장은 이 때부터 구전 서술, 독립기념관 등을 통해 근거자료를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김 회장의 노력은 국유림사업소를 움직였고 결국 식재되어 있던 나무들은 다른 곳으로 이식됐다.

음성지역 선각자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정을 <음성의 소리>에서 소개한다.

 

고병택 기자  marco1717@naver.com

<저작권자 © 음성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고병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