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며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올 초 이 칼럼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썼다가 제대로 내보내지 못한 글을 발견했다. 경제민주화 입법 및 노동개혁 입법, 보육재정 문제 등을 놓고 청와대와 정치권이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던 때였다. 당시 이 글을 왜 유보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야가 국가적 어젠다를 대화로 풀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현실을 ‘체제 타락’이라고 꼬집은 용어가 문제가 됐던 것 같다.      

병신년을 보내는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정치풍경은 올 초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찍이 완고한 권력의 정체를 알아본 노학자의 혜안에 의지해 체제의 위기를 염려한 필자의 글은 비록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해도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고 판단된다. 조기 대선과 한반도 정세 변화 등 그 어느 때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많은 정유년 새해를 조망하는 취지에서 올 2월 초 작성된 칼럼을 그대로 재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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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정치학자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노재봉 전 서울대 교수는 최근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민주체제를 경영하는 통치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는, 바꿔 말해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주어진 책임과 권한의 행사를 포기한 작금의 상황을 ‘체제 타락‘이라고 명명했다.

이 권력의 중심엔 대통령과 국회가 있지만 그는 먼저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은 국정의 종국적 지도자로서 여야를 막론하고 접촉하여 숙의하고 설득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스스로 권력행사 의무를 유예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쓴소리는 국회 및 여야 정당도 겨냥한다. 입법권을 포기한 국회 역시 권력행사 포기의 한 예이며,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은 ‘비 맞지 않는 건물(국회)에서 데모와 태업을 일삼는 고급 월급쟁이’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노동개혁 5법과 경제활성화 2법 등의 처리를 놓고 수개월째 동어반복적인 네탓 공방과 민망한 막말을 주고받는 청와대와 정치권을 보면서 노(老) 학자의 ‘체제 타락’이란 말이 유달리 가슴에 와닿는다. 민주주의의 작동원리가 대의정치와 다수결, 협상과 타협, 존중과 배려, 권한과 책임의 균형일진대 지금 우리사회 어디에서도 그런 가치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권력의 포기라는 말이 나오는 전후 사정의 정점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실한 사람’을 화두로 여당을 몰아치고 ‘국민심판론’을 잣대로 야당을 압박해온 박 대통령은 급기야 18일 경제계가 주도하는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 에 직접 참여해 서명하는 이벤트까지 벌였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야당이 발목 잡고 직권상정도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행정부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 셈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이날 서명에 앞선 정부부처 업무보고 자리에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경제와 테러위험을 극복하고자 경제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입법서명운동이 시작됐는데 오죽하면 국민들이 나섰겠냐”며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니 국민들이 바로잡으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적극적 공감을 표시했다. “국민이 직접나선 서명에 동참해 국민과 같이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는 청와대 설명도 이어졌다.  

회견 때 한숨 쉬며, 또 동물국회 식물국회까지 거론하며 경제 민생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호소했던 박 대통령이 국민서명에 동참한 충정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과반이 훌쩍 넘는 여당의석을 갖고도 국회선진화법의 벽 때문에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입법 상황을 보며 속을 얼마나 태웠을지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앞에 언급한 노 학자 얘기로 보면 박 대통령의 통치권력 행사방법과 대상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민주체제의 통치권력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를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되레 행사를 포기하는 결과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정치적 리더십과 다양한 수단을 가동해 지지세력을 이끌고 반대세력을 설득하고 달래가며 국정목표를 이뤄나가는 것이 맞다. 자발성이 의심되는 경제단체나 시민단체의 서명운동에 가세해 정치적 의사를 관철하려는 것은 박대통령이 극구 경계해온 포퓰리즘의 변형과 다름없다.

이런 즈음에 한국노총은 19일 노동개혁 5법의 모태가 된 노사정 대타협의 파기를 선언했다. 이 정부가 애지중지 가꿔온 현안이기에 아쉬움이 크겠지만 이런 상황에 이른 데에는 노동계의 근본주의적 단견 이상으로 정부의 전략부재 등 안이한 대처도 한몫했다. ‘쉬운 해고’라는 노동계의 프레임을 정부의 일방적 지침으로 누르려다 파국만 낳은 셈이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이 “정부가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논란이 된) 양대 지침을 노동개혁의 핵심사안으로 부각하면서 노동계는 새로운 해고제도가 도입된다는 과도한 우려를, 경영계는 과도한 기대를 갖게 됐다”며 “정부가 노총 집행부의 비공개 요청을 묵살하고 공개적으로 전문가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조급하게 협의를 재개해온 것이 (합의 파기) 사태를 촉발했다”고 말한 맥락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책임 떠넘기기로 초읽기에 들어간 보육대란 파행도 우리 체제가 취약함을 넘어 타락 상태에 빠져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파적 접근을 앞세운 사적 이해가 공공연히 공적 이익을 무력화하는 시스템은 공동체의 건강성을 보장하지도, 미래를 개척하지도 못한다. 시스템이 타락한 까닭에 애꿎은 부모들만 날벼락을 맞게 된 형국이다.

다시 서두의 노 학자 얘기로 돌아가면 대통령과 국회 등 통치권력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통치포기이며 권력포기이고 이는 곧 체제 타락으로 귀결돼 시스템은 먹통이 된다. 먹통이 된 시스템 앞에서 민생이니 일자리니 청년이니 미래니 하는 말들은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노 학자의 결론은 간결하다. “투표에 의한 유권자의 선택은 민주체제를 더 민주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체제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다가오는 총선은 정치회복 또는 통치기능의 회복이 중심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은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문득 플라톤의 말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정치를 방치한 대가는 저질스러운 세력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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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글이 플라톤의 말로 끝맺음했다면, 오늘 이 글은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경구로 맺는다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오직 선의 무관심이다." <뉴스1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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