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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숙자 칼럼> 그분의 향기반숙자 수필가
반숙자 수필가.

그분의 향기

우리 집에 야래향 화분이 하나 있다. 꽃이 피지 않을 때는 베란다 한쪽에서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여름 저녁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꽃봉오리를 열고 자근자근 향기를 풀어 낸다. 

그러다가 동이 틀 무렵이면 꽃은 그대로 있으나 향기는 없다. 밤에만 퍼지는 신비한 향기다. 그 향기에 사로잡혀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향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향기 같은 분을 알고 있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입꼬리에 미소가 매달리게 하는 그분은 수사님이다. 수녀님들처럼 독신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는 수도자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짧게 깎은 상고머리, 긴 수도복을 스치며 복도를 지나가면 순결의 기미가 향기처럼 남는다.

꽃동네 신상현 원장수사.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에서였다. 가끔 봉사하러 그곳에 가지만, 자주 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학의 밤이나 다른 행사장에서 먼빛으로 그림자만 보고 와도 뿌듯하고 좋았다. 

그분은 죽을 때 에이즈라는 병을 앓다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순결한 분이 왜 하필이면 끔찍한 에이즈에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는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기자하고 인터뷰하는 글에서 안개 같은 그분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꽃동네 초창기에 해당하는 시절이니 벌써 30여 년도 전이다. 밤마다 성모님 상 앞에 서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의학도로서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였다. 그가 방학 기간에 봉사자로 꽃동네 가족들을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낮에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깊은 밤이면 성모상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방학이 지나 학교로 돌아간 그는 다음 방학 때 또 봉사를 왔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의 왕래를 거듭한 끝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꽃동네 병원에 자원하여 들어오고 꽃동네에서 수도자로 살기 시작했다. 오랜 수련 끝에 수사가 된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꽃동네 수도자들을 돌보는 숨은 일꾼이 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몇 년째 방학 동안 꽃동네에서 봉사하면서 자신의 성소가 하느님의 뜻인가를 성모님께 여쭤 보느라 밤마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분에게도 세상에 대한 선망이 왜 없었겠는가. 10여 년 간의 의학도 생활에서 부모님의 희생은 얼마나 컸으며 기대 또한 저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병든 사람은 도처에 있다. 어디선들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일하면 되지, 평생 독신으로 꽃동네의 불우한 사람들 속에 젊음을 바치기에는 억울한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에게 묻지 않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 앞에서 수많은 질문을 드렸을 것이다. 떼도 썼을 것이다. 그분에게 돌아온 응답을 그분 외에는 모른다. 다만 그는 그 응답의 내용을 온몸으로, 영혼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꽃동네형제회 신상현 원장수사가 꽃동네 인곡자애병원 환우를 돌보고 있다.

음성에는 해마다 품바 축제가 열린다. 음성 꽃동네를 설립하게 된 동인이 되었던 거지 성자 최귀동 할아버지의 나눔 정신을 재현해 보자고 한 축제다. 그러기 때문에 꽃동네 가족들이 대거 참여하고 수도자들이 애를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꽃동네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지어 나누고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한다. 이때도 그분은 긴 밤색 수도복을 입고 목에 두건을 두르고 사람들 앞에 선다. 수도복을 자랑함이 아니라 수도사들도 대중 속에 함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기 위해서다. 

낮에는 수도자로 행정 업무와 프로그램 진행 등에 바삐 살다가 저녁이면 수도복을 벗고 하얀 가운을 입는다. 병실의 밤은 신음 소리가 삼킨 적요가 휭휭하다. 봉사자들도 당직만 남고 돌아가고 함박산 속 병실은 스산하기만 하다. 

이때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넓은 병실을 돌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다. 오늘 손잡아 준 분이 내일 밤이면 세상에 없는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그분은 환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듯 다가선다. 

꽃동네인곡자애병원 5층 호스피스 병동에서 (왼쪽부터) 신상현 수사, 오요한 씨, 김명심 수녀가 활짝 웃고 있다

청진기로 짚어 내지 못하는 외로움이라는 병도 그분 눈길이 닿으면 눈 녹듯 녹고 그 자리에 사랑이 움튼다. 그분이 특히 마음을 쓰는 일은 임종 환자 돌보기다. 임종에 들어가는 분을 위해 자리를 지키며 손잡고 기도로 배웅을 한다.

우리가 단잠에 빠졌을 때, 하루 삶의 무게로 짓눌리는 육신을 끌고 아파하는 환자들을 찾아가는 그의 행보는 비밀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평생을 그렇게 살고 있는 그분의 여정은 어쩌면 야래향 같은 향기가 아닐까. 

기도하고 사랑하고 기쁘게 드리는 일생, 고귀하다. 그러면서도 죽을 때 에이즈 환자가 되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다는 가난한 소망, 눈물겹다.

야래향이 꽃이 전하는 최상의 향기라면, 그분은 사람이 향기가 되는 최고의 번제물이다.

음성타임즈  webmaster@es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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